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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무부 본부장관 겸 대북특별대표 방한
볼턴이 ‘유화적’ ‘위험하다’ 평했던 인물
문재인 정부 차원의 고마움 짙게 깔려
주한미국대사관은 지난 5월 페이스북 계정에 비건 부장관이 집에서 닭한마리를 요리해 먹는 짧은 영상을 공개했다. 주한미국대사관 페이스북 갈무리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특별대표가 8일 한국을 방문했다. 북-미 협상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보인 비건 부장관의 임기 내 마지막 방문인 만큼 한국 정부에서 이번 방한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어 눈길을 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임기가 한 달 남짓 남은 상황에서 이뤄진 비건 부장관의 방한은 지난달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의 초청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최 차관은 지난달 전국경제인연합회·미국상공회의소 주최 한-미재계회의에 화상으로 참여한 비건 부장관에게 임기 내 마지막이 될 한국 방문을 제안했다. 특히 최 장관은 초청을 제안하며
‘닭한마리와 소주를 대접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곁들였다고 전해진다. 방한할 때마다 묵는 숙소 앞 닭한마리 식당에서 식사하는 데다 미국 집에서도 직접 닭한마리 요리에 도전할 정도인 비건 부장관의 ‘닭한마리 사랑’을 고려한 것이다. 이에 비건 부장관은 ‘닭한마리는 언제든 좋다’고 화답했고 실제 흔쾌히 초청을 받아들여 일정을 조율했다고 알려졌다. 최 차관은 실제 약속대로 10일 비건 부장관의 ‘단골’인 닭한마리 식당을 통째로 빌려 만찬을 대접한다. 외교부 쪽은 방역 지침을 지키기 위한 공간 확보 차원에서 식당 전체를 예약한 것으로 전해졌다.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부장관이 9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에서 최종건 외교부 1차관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9일 오전 최 차관과의 한-미 차관회담으로 공식 일정을 시작하는
비건 부장관은 3박4일 동안 그간 보조를 맞춰온 외교·안보 고위 인사들과 두루 만나 작별 인사를 할 예정이다. 이들과는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협상 과정에 대한 평가와 소회를 나눌 것으로 보인다. 9일 오후에는 비건 부장관이 한국 쪽에서 가장 오래 가깝게 보조를 맞춰온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만나 미국 정권 이양기의 한반도 정세 안정과 조 바이든 신임 행정부에 인수인계할 한반도 주요 문제에 대해 협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어 이 본부장 주최 만찬이 열린다. 10일에는 이인영 통일부 장관과 조찬이 계획돼 있다. 비건 부장관의 메시지는 이날 오후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열리는 강연에서 나올 전망이다. 미국의 대북특별대표로서 마지막이 될 것으로 보이는 이 메시지에 그간의 소회와 함께 북한을 비롯해 차기 미 행정부를 향한 조언이 담길지 주목된다. 11일에는 한국을 방문 중인 켄트 해슈테트 스웨덴 한반도특사 및 이도훈 본부장과 오찬이 예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출국 전 마지막 저녁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서울 한남동 공관에서 대접한다. 외교부 고위급이 사흘에 걸쳐 그의 저녁을 책임지는 것이다. 이밖에도 비건 부장관은 서훈 국가안보실장,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 박지원 국가정보원장과도 만나 면담이나 식사를 할 계획으로 전해졌다.
주한미국대사관은 지난 5월 페이스북 계정에 비건 부장관이 집에서 닭한마리를 요리해 먹는 짧은 영상을 공개했다. 주한미국대사관 페이스북 갈무리
일각에서는 한국 외교·안보라인이 총출동해 떠나는 비건 부장관을 극진히 대접하는 것을 마뜩찮게 여긴다. 이런 점을 의식한 듯 외교부 당국자는 8일 기자들과 만나
“부장관이 오는데 장관까지 나서서 잘해주냐는 이야기가 있을 수 있지만, 떠나는 분에게까지 친절하게 대해줄 만큼 한미동맹은 소중하다”고 설명했다.
사실 이런 대접의 바탕에는 비건 부장관을 향한 문재인 정부의 고마움이 짙게 깔려있다. 외교부는 그의 방한 일정을 알린 7일 보도자료에서 강 장관이 “격려 만찬”을 주최한다고 썼다. 2018년 8월 말 그가 대북특별대표로 임명됐을 때만 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당시 포드자동차 국제담당 부회장으로 포드에서 14년에 걸쳐 주요 간부로 재직하던 중 발탁된 그는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참모, 존 매케인 공화당 대선 후보의 외교자문역을 맡고 미 상·하원 외교위원회에서도 일한 ‘전문가’로 소개됐다.
주목도는 높았으나 기대는 높지 않았다. 곧 이뤄진 그의 첫 방한 뒤 한국 쪽에서는 ‘사람이 참 괜찮더라’는 반응 일색이었다. 2018년 12월 그는 꽤 전향적인 메시지를 들고 왔다. 입국길에 트럼프 행정부가 새해 대북 인도적 지원을 허용할 뜻을 내비치며, 이와 관련한 미국 시민의 북한 여행 금지 조처를 재검토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2018년 8월23일(현지시각)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4차 방북 계획과 비건(왼쪽) 신임 대북특별대표 임명 소식을 전하고 있다. 27일로 예정됐던 폼페이오 장관의 4차 평양 방문은 발표 하루 만에 취소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비건 부장관이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취임 5개월 만인 2019년 1월3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탠포드대 연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연설은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1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소강기에 빠졌던 북-미 관계에 추동력을 더한 요인 중 하나가 됐다. 연설에서 그는 ‘북-미 비핵화-평화체제 구축’ 협상의 ‘동시적·병행적’ 이행을 제시했다. 앞서 1990년대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추진했던 북한의 비핵화 조처에 대응해 미국은 상응 조처를 한다는 이른바 ‘행동 대 행동’ 원칙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또 “전쟁을 끝낼 준비가 돼 있다”거나 “북한 정권의 전복을 추구하지 않는다”며 트럼프 행정부의 ‘북 체재 보장 의지’를 명시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부분적인 제재 완화 가능성도 시사했다. 아울러 북-미 간 체제가 다르다는 점을 조심스레 꺼내들며 자존심 강한 북한에 사려깊게 접근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2019년 1월31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강연을 위해 걸어 들어가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후
문재인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그에 대해 가장 많이 한 얘기가 “비건은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비건 부장관처럼 진정성 있게 북한 문제를 접근하는 미국 관료를 접해보지 못했다는 말도 자주 했다. 대북 초강경파인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에서도 비건 부장관은 ‘유화적’이라고 비판하는 대목이 여러 군데 나온다. 볼턴은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실무협상을 이끌었던 비건 부장관이 김혁철 당시 북한 대미특별대표와 만든 합의문 초안을 두고 “트럼프의 사전 양보만 열거해 놓고 대가로 북한은 또 다른 모호한 비핵화 성명만 넣은 것”이라고 혹평하며 자신이 전방위적으로 ‘보이콧했다’고 썼다.
볼턴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비건 부장관의 집념이 상당했으며 이를 위험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비건 부장관은 폼페이오 장관의 4차 방북(2018년 10월)에 동행한 데 이어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2019년 2월 초 2박3일 일정으로 평양을 방문해 실무협상을 진행한 바 있다.
세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이 2019년 2월 28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스타그램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헤어지면서 밝게 웃으며 악수하는 사진을 올렸다. <한겨레> 자료사진
비건은 지난해 10월 말 미 국무부 부장관으로 승진했으나 대북특별대표직을 내려놓지 않았다. 꼭 1년 전 방한 때는 북한을 향해 “이제 함께 일할 때가 됐고, 일을 끝낼 때가 됐다”며 서울에 머무는 동안 북한과 만날 의사가 있다고 밝히는 등 지난해 10월 스톡홀름 협상 뒤 교착을 깨기 위해 여러 차례 북쪽에 메시지를 전했다. 하지만 그는 북쪽으로부터 답을 듣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비건 부장관은 멈춰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겨울을 끝으로 지금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됐다. 하지만 그의 고별 방한을 준비하며 고마운 마음을 떠올리는 이들은 다시 설렜던 ‘한반도의 봄’을 기약하는 모습이다. 김지은 기자
mir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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